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느냐고 묻자, 아무런 대꾸가 없다. 그러더니, ‘주민등록증’을 딱 꺼내놓았다. 자세히 보니, 명함이다. 크기와 색깔이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이 명함엔 ‘410729―123―거시기’라는 주민번호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래를 보니 고문관(考聞官)이라는 재치 있는 조어(造語)로 자신을 ‘소개’했고, 뒷면엔 ‘이것저것 연구소장’이라는 또 다른 직함을 파놓았다. 앞·뒷면에 새겨진 그의 상호(商號)는 ‘38 오디오’. 무슨 뜻인지 물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38 광땡을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갖다 붙였지 뭐.”
우리나라 최고의 음향전문가 김벌래(본명 김평호·71)의 이력을 듣는 데만 거의 1시간이 소요됐다. 그의 특이한 이름은 포털사이트에 ‘김벌레’를 쳐도, ‘김벌래’로 검색될 만큼 보편적이면서 유명하다. 이 사실을 전해주자, 그는 ‘껄껄’ 웃기만 했다.
그는 음향 전문가지만 ‘사운드 디자이너’로 불리길 좋아한다. 그렇게 불려야 ‘폼’이 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제게 보통 ‘음향의 달인’ ‘광고 소리의 대부’ 이런 수식들을 갖다 붙이는데, 그거 다 헛소리예요. 자기들이 안 하던 것을 제가 하니까, 이것저것 갖다 붙이고 싶어하는 거죠. 엄밀히 따지면 다 개수작이에요. 전 아직도 배우는 놈이에요. 아직도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
공부를 위해 ‘이것저것 연구소’도 차렸다는 그가 포용하는 연구 범위는 넓다. 소리를 주로 연구할 것 같다고 은근슬쩍 들이밀자, 그는 “그런 연구는 전혀 안 한다”며 “요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취하지 않고 술을 많이 먹을 수 있을까 같은 것”이라고 호탕하게 웃었다. 158㎝의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을 앞세우는 그는 여전히 기개와 강단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인터뷰 내내 손짓, 몸짓 다 섞어가며 ‘진실만을 얘기하는’ 듯한 그의 표정에선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읽혔고, 앞으로 할 일과 목표에 대한 얘기를 이어갈 땐 장인 정신의 태도가 그려졌다. 어떤 일화를 얘기하면서 흥분이 치솟을 땐 비어 있는 커피 잔을 향해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더”하며 분위기도 밝게 이끌 줄 아는 재담꾼이었다. 지금까지 2만여 편의 소리를 만들며 대중의 청각을 쉴 새 없이 자극해온 그의 인생 이야기를 따라가봤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정년 퇴직(홍익대 광고홍보학과 겸임교수)한 지 4년 됐어요. 지금은 이어령 전 장관이 교장으로 있는 경기 창조학교에서 교수직을 수행하고 있어요. 그곳은 3세부터 80세까지를 대상으로 평생 교육을 실시하거든요. 사물놀이의 김덕수, 클래식의 조수미, 인문학의 이어령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 60명이 교수진을 형성하고 있어요. 비디오작가 고 백남준과 이 학교 창설에 대한 논의를 하고 경기도에서 적극 지원했죠. 전문가들이 제대로 가르쳐 진짜 아티스트를 길러보자는 취지예요.”
김벌래가 이룩한 성과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의 이력은 ‘최초’와 ‘최고’로만 요약된다. 1960년대 초 한국 최초로 음향 효과와 효과음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그는 1990년대까지 광고, 방송, 대형 이벤트 분야에서 사용된 효과음 90% 이상을 싹쓸이했다. 맥주병 딸 때 ‘뻥’하는 소리, 럭키 치약을 광고할 때 풍선으로 사용된 ‘뽀드득’소리, 박카스 병마개 따는 소리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콜라병 마개를 딸 때 기대와 긴장을 모두 안겨주는 ‘쉭―쉭’하는 시원한 소리였다. 그는 이 소리로 당시 콜라회사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아 집 한 채를 장만하기도 했다. 굵직한 이벤트에서도 그의 이름은 팔려다니기 바빴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 및 대전엑스포 등 대형 이벤트에서 사운드 연출과 제작을 도맡아 ‘소리의 달인’이란 극찬을 얻었다.
―멋있는 소리의 탄생 비화도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콜라 소리는 ‘마시면 상쾌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 보라는 내용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소리로 만들어 내겠어요? 처음엔 맥주병, 소주병을 따서 해봤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고무 풍선을 터뜨려 만들었는데 재질이 약해 무용지물이었죠. 그래서 고안해낸 게 콘돔이었어요. 그걸 두 겹, 세 겹 겹쳐 해보니, 그럴싸한 소리가 났죠. 예쁜 여자가 혀로 이를 핥아 나는 소리인 ‘뽀드득’은 풍선에 물을 묻혀 손으로 훑었어요. 아이디어 면에선 용각산 소리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역발상을 생각해낸 거죠.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로 ‘무소리의 소리’를 구현해 봤어요.”
―작품료는 얼마나 받나요.
“얼마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그게 결국 작품 값을 흥정하겠다는 거잖아요. 작품에 무슨 가격을 매길 수 있나요? 그래서 일부러 높은 가격을 부르기도 해요. 한번은 서울시에서 상상의 동물인 해치 소리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왔어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어떤 소리로 만들어야 할지 막막했죠. 어느 날 소주를 마시다 라디오에서 뱃노래를 듣는데, ‘이거다’는 생각이 스치더라고요. 미래를 상징할 것 같은 소리라는 확신이 들어 만들어 줬더니, 세계적인 소리가 나왔다며 관계자들이 좋아하더라고. 담당자가 가격을 물어보길래, 못 낮추도록 ‘에라 나도 모르겠다’하고 1억 원을 불렀어요. 그때 그 사람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공무원들이 0.7초밖에 안 되는 해치 울음소리 가격이 기껏해야 몇 백만 원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한 6개월 조용하다 작년에 돈을 받았는데, 통장에 5000만 원이 들어왔더라고요. 88 서울올림픽 때 개막식·폐막식 소리를 만들고 나서는 박세직 조직위원장이 ‘얼마냐?’고 묻길래, ‘알아서 주세요’했더니 600만 원 주더라고요.”
―2002년 월드컵 당시 귀가 먹은 걸로 아는데요.
“월드컵 전야제를 준비하느라 너무 지쳐 강원 평창으로 도망갔어요. 6월4일 첫 게임 때, 광화문에 구름같은 인파가 몰렸잖아요. 그때 광화문은 거의 ‘무성 영화’였죠. 전광판은 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자 ‘소리 나오게 해달라’는 민원이 끊이질 않았어요. 관계자들이 평창으로 달려와 제게 ‘구애’를 펼쳤죠. 제가 체신학교를 나온 덕분에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저만의 노하우가 있었거든요.(비법을 알려달라고 하자, 그는 ‘전매 특허’라며 끝까지 거절했다.) 제가 손을 대자, 남대문 일대 모든 전광판에서 일제히 소리가 났죠. 그런데 어느 스피커 소리는 작다고 난리를 치는 통에 그 앞에서 듣고 소리를 조절하고 그랬는데, 경기가 4강까지 가니 계속 스피커 앞에서 일을 보다 귀가 먹었죠.”
―소리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영화나 연극, 광고에 들어가는 소리는 그 특징이 대개 비슷해요. 그 작품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장치일 뿐이죠. 즐거울 땐 더 즐겁게, 슬플 땐 더 슬프게 하는 목적이 가장 크지 않겠어요? 사운드는 제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에요.”
김벌래는 소리는 ‘창작’되는 것이 아니라 ‘차용’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창작되는 순간, 소리의 보편성과 대중성이 사라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창작할 땐 나만 기쁘고 만족하는 소리로 묻히기 쉽다”며 “그래서 소리는 다른 아이디어에서 빌려와야 한다”고 했다. 붉은 악마에 의해 월드컵 응원가로 쓰인 ‘대∼한민국’도 그의 ‘차용 아이디어’에서 나온 산물 중 하나다. 당시 붉은 악마 회원들과 응원가 제작 회의를 하던 도중, 어떤 아줌마가 ‘굿거리’ 장단을 해보라는 아이디어를 줘서 김벌래가 김덕수와 함께 100개가 넘는 굿거리 장단 중 하나를 골라 리듬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해서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박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 소리에 대한 수요가 적을 듯한데요.
“디지털이 어떻게 나왔겠어요? 아날로그 때문에 연구한 게 디지털이잖아요. 스마트폰의 원리도 다 아날로그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자부심이 있어요. 올해 하반기부터 그래서 준비하는 게 있어요. 창조학교에 다니면서 연구한 건데, 아날로그 연극을 해보는 거예요. 박정자, 오현경 같은 노배우들을 불러 연극을 하되, 대본을 보면서 하는 식이죠. 창극처럼 1인 10역을 하고, 전 옆에서 물레 돌려 바람소리 내고, 부채에다 콩 달아서 소나기 소리 내고 하는 거예요. 어른들을 위한 공연을 준비할 겁니다.”
―소리 중 가장 만족하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허허. 다 실패야. 음향은 오케이가 없어요. 베토벤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곡이 없다고 하잖아요. 예술가에게 만점이란 존재하지 않죠. 특히 음향 효과는 대부분 60∼70점이에요.”
김벌래는 어릴 때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돌아봤다.
“9세 때 어머니가 죽었어요. 소아마비여서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하고 30세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키도 작고 엄마 없이 살았으니, 학교에선 늘 ‘왕따’ 취급당했어요. 친구는 집 근처 다리 밑에 살던 거지들이 전부였죠. 그들과 놀면서 세상 사는 법을 일찍 터득했던 것 같아요. 거지들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었거든요. 물론 내일도 없었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살았던 그는 거지형들로부터 배운 철학 ‘오늘에 충실하고 만족하라’를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다. 늘 도전과 실험, 모험에 쉽게 적응하는 것도 ‘카르페 디엠(Carpe diem·순간을 즐겨라)’ 원칙에서 비롯됐다. 65세 이전까지 스킨 스쿠버와 스카이 다이빙을 즐겼던 그는 “늘 남이 안 해본 걸 해보고 싶은 욕구가 넘친다”며 “남하는 걸 따라하면 만년 2등 아니겠느냐”고 웃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무엇에 쫓기는지 왠지 빨라 보였다. 그에게 하루의 시간이란 그렇게 쓰이고 있었다.
<자료 : 문화일보(김고금평 기자)>